가족 건물을 오랫동안 관리하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했다면 횡령죄로 처벌되나요?
가족 건물 관리자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경우 업무상횡령죄 성립 기준을 대법원 판결로 정리합니다.
가족 소유 부동산을 수십 년간 대신 관리해 온 사람이 임대차보증금의 정확한 사용처를 밝히지 못하더라도, 그 사정만으로 업무상횡령죄가 성립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은 원룸 건물을 약 30년간 관리해 온 형이 동생 소유 임대차보증금을 다른 세입자에게 반환하는 데 사용했다가 기소된 사건에서, 폭넓은 관리 재량을 인정받아 온 경우라면 사용처 불명 사정만으로 불법영득의사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원심을 파기했습니다. 이 판단은 형제자매 등 가족 간에 부동산 관리를 위임하는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분쟁에서 형사처벌의 경계선을 어떻게 가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족 명의 부동산을 장기간 관리해 온 사람이 보증금 사용처를 정확히 소명하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업무상횡령죄가 곧바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관리자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재량을 부여받아 왔는지, 그리고 자금을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 임의로 처분하려는 불법영득의사가 있었는지입니다. 이하에서는 이번 대법원 판단의 사실관계와 법리, 그리고 가족 간 재산관리 분쟁에서 실제로 다투어지는 쟁점을 살펴봅니다.
어떤 사실관계에서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했나
A씨는 1996년부터 서울 노원구에 있는 원룸 건물을 사실상 혼자 관리해 왔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A씨의 모친 소유였으나, 모친이 2018년 사망하기 전 A씨의 형제자매인 B씨와 C씨에게 지분 절반씩 증여되었습니다. B씨와 C씨는 건물 관리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그 업무 전반을 A씨에게 위임한 채 지내 왔습니다.
문제는 2020년 9월경 발생했습니다. A씨는 한 세입자로부터 새로운 임대차보증금을 받았는데, 이 돈을 그 세입자에게 반환해야 할 시점에 정작 다른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데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래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했고, 검찰은 A씨를 업무상횡령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A씨에게 유죄를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피해 세입자에게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배상명령까지 함께 내렸습니다. 자금의 정확한 사용처를 명확히 소명하지 못했다는 점이 유죄 판단의 주된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 제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이 판단을 뒤집었습니다. 대법원은 2026년 9월 3일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A씨가 오랜 기간 보증금 수령과 반환, 건물 관리비 지출 등에 관해 사실상 독자적인 재량을 인정받아 온 점을 중시했습니다. 새로운 보증금을 받아 기존 임차인에게 돌려주는 방식은 임대차보증금을 사실상 순환시켜 온 기존 관리 관행의 연장선으로 볼 여지가 있고, 단지 사용처를 명확히 소명하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임의로 처분하려는 불법영득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취지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오랜 기간 형성된 관리 재량의 실질과 위탁 취지에 반하는 처분이 있었는지를 다시 심리해야 하는 단계로 돌아갔습니다.
가족 간 재산관리에서 불법영득의사를 가르는 기준
보관자 지위와 위탁관계의 성립
업무상횡령죄가 성립하려면 우선 행위자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어야 합니다. 형법 제355조 제1항의 횡령죄를 업무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른 경우 형법 제356조가 가중처벌하는 구조입니다. 가족 간에는 별도의 계약서 없이 구두로 관리를 위임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범위의 권한이 위탁되었는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흔합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A씨가 B씨, C씨로부터 명시적인 업무 위임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수십 년간 실질적으로 관리 업무를 전담해 온 사실관계 자체가 위탁관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재량의 범위와 사용처 소명책임의 한계
이번 판단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형사재판에서 자금 사용처를 소명하지 못했다는 사정이 곧바로 유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형사절차에서 유죄의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고, 피고인이 자신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특정한 방식으로 자금을 운용해 온 관행이 있었다면, 그 관행에서 벗어나지 않은 처분은 위탁 취지에 반하는 임의처분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는 사안마다 재량의 실제 범위, 다른 공동소유자들의 묵시적 승인 여부, 자금 흐름의 구체적 내역 등을 종합적으로 심리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서울서부지방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다투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형사 무죄와 별개로 남는 민사상 정산 문제
이번 대법원 판단은 형사처벌의 근거가 되는 불법영득의사를 부정한 것일 뿐, 관리자가 공동소유자나 세입자에 대해 부담하는 민사상 반환의무나 정산의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는 여전히 임대인을 상대로 보증금반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고, 관리를 위임한 형제자매 역시 관리자를 상대로 그동안의 수입과 지출 내역에 대한 정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가족 간 부동산 관리 분쟁은 이처럼 형사고소와 민사상 정산청구가 함께 얽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어느 절차에서 어떤 자료를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분쟁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다투어지는 지점
관리를 맡아온 쪽이 고소를 당한 입장이라면, 그동안의 관리 방식이 공동소유자들의 묵시적 승인 아래 반복되어 온 관행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방어의 핵심입니다. 통장 거래내역, 임대차계약서, 관리비 지출 내역, 공동소유자와 주고받은 연락 내용 등이 재량의 실제 범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됩니다. 반대로 관리를 위임한 공동소유자나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 입장에서는, 위탁관계가 성립한 시점과 범위를 명확히 특정하고 형사고소와 별도로 민사상 정산·반환청구를 함께 준비하는 것이 실무적으로 중요합니다. 관리 기간이 길고 관행이 누적되어 온 사안일수록, 어느 시점의 어떤 처분이 위탁 취지를 벗어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려내는 작업이 사건 전체의 향방을 가르게 됩니다.